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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eady drip

은회랑 2013. 1. 1. 21:36

A steady drip



I'm frozen to the bones, I am..

A million mile from home, I'm walking away

I can't remind your eyes, your face


클레이 카츠마렉에게 윌리엄 마일즈란 사람은 항상 높은 곳에 있어 잡을 수 없는 존재와도 같았다. 따라잡으려 붙잡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엔 손에 닿지 않는 느낌. 그는 하늘을 선회하는 독수리, 자신은 땅 위에서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늑대.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클레이는 묘하게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쁜 감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아마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제 아버지에게 느끼던 감정과도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가족과 비슷한, 아버지에게 느끼는 동경, 경외심. 그리고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은 죽어도 없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곱씹어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정의내리는 것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저, 자신은 그와 함께 있을 때가 좋을 뿐이다. 그저 그것뿐이다. 사실 클레이는 윌리엄을 맹목적으로 따랐다고 봐도 만무했다. 그 정도로 그는 자신의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새삼 그의 등을 쫒아 옮겨 다니는 제 시선에 클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바보같이.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가끔씩은 저도 모르게 티가 나버리는 탓에 클레이는 맥없이 웃었다.


너는 너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오늘, 우리의 신조라는 기둥을 받치는 데 너 자신을 맡겨라. 우리는 암살단이다.


클레이는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정식으로 암살단이 되었을 때를.


우리는 유명인이 아니다. 절대 우리 스스로를 위해 공허한 명성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군중 속에서 움직여야 해.


이따금 윌리엄은 잔뜩 풀 죽어있는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린다. 제 아들뻘 되는 그는 실제로 나이도 제 아들 또래라서, 가끔씩 정말로 친아들처럼 여겨졌다. 그는 성실하고, 생각도 깊고 위트 있다. 아마도, 좋은 여성과 결혼하겠지. 그리고 으레 암살단원들처럼 자식을 낳고, 선조의 피를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자유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함께 일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티타임을 가질 때마다 그는 항상 누가 가져다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윌리엄의 것을 같이 챙겨오곤 했다. 머그컵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손에 전해져 올 때면, 윌리엄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대하듯 그에게 감사해했다. 그는 그러면 피식 웃으며 뭘요. 하고 화답했다. 대견하게 큰 아들 녀석을 보는 기분이라, 윌리엄은 그가 귀여웠다. 다 큰 성인 남성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는 건 좀 이상할지 몰라도, 적어도 윌리엄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나쁠 건 없으니까.


"윌리엄."

"음?"

"아뇨, 아닙니다. 일 보세요."


대부분의 대화는 짧고 간단하게. 그마저도 대부분은 임무에 대한 것으로 둘 사이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저, 클레이는 가끔씩 뜻 모를 눈빛으로 윌리엄을 바라보곤 했다. 그것을 윌리엄은 아는지 모르는지 클레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등을 두드리며 가볍게 스킨십을 했다. 그는 가장 성실했고, 말 잘 듣는 유능한 동료였기에 윌리엄은 그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것은 없었을 거라고 윌리엄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렇게나 그를 믿고 있었기에 그는 클레이를 앱스테르고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수 세기 동안 우리는 인류를 지배하는 데 전념했던 성당기사단과 전쟁을 벌여 왔다. 앱스테르고는 그들의 은신처이자 지구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천이다.”

“제가 뭘 찾으면 됩니까?”

“앨런 리킨의 컴퓨터. ‘애니머스 프로젝트’ 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놀라워! 80년대부터 애니머스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예산이 이렇게 많다니. 이번엔 좀 더 깊게 들어가야 해. 앱스테르고가 우리 DNA에서 진짜 찾고자 하는 게 뭔지 찾아봐. 자네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네, 클레이.”


클레이는 처음엔 조금 의아해했다. 왜 자신이? 하지만 그건 그가 자신을 믿고 있고, 자신의 실력을 신뢰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괜스레 들뜨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가 틀릴 리는 없었고, 그는 멘토 였으니까. 암살단원이라면 무릇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클레이는 그와 계획을 짜고 훈련에 매진했다. 클레이가 앱스테르고 잠입에 성공한 후 애니머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 클레이는 좀 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숙하게 알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일로 윌리엄과 상의했다. 윌리엄은 루시 스틸만에 대해 말했다. 앱스테르고에 위장 취업하는 것, 그리고 실험체가 되어 그들의 음모를 알아내는 것. 앱스테르고로 들어가게 되면서 윌리엄은 그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루시와 믿고 협력해서 꼭 빠져나올 것, 그녀를 절대적으로 믿을 것, 그리고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을 것. 그리고 실행 전날 밤, 클레이는 잠이 오지 않아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칫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악의 결말은 개죽음 당하는 것이었으니.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이 방 안을 뒤덮고 있었다. 살갗에 가볍게 소름이 돋아난다. 생각보다 새벽의 추위는 상당해서, 뭐라도 걸치고 있지 않다간 금방 감기에 걸릴 것만 같다. 클레이는 붉어진 손끝에 하- 하고 입김을 불며 거실로 들어갔다. 신문을 보며 앉아있는 윌리엄은 누가 오건말건 가만히 앉아 시선을 고정한 채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간다. 클레이는 가볍게 웃으며 뒤에서 양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금세 시선을 돌려 제 쪽을 응시한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표정에 "그냥요." 하고 클레이는 미소로 답한다. 그는 마시던 머그컵을 그의 손에 들려주며 제 윗옷을 벗어 그에게 걸쳐주었다. 머그컵이 삼분의 일쯤 담겨있는 커피가 잔 안에서 찰랑거린다. 손에 온기가 전해져온다.


"마셔도 되요?"

"물론이지. 아니면 새로 한잔 타줄까?"

"아뇨, 괜찮아요."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혀에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감돈다. 사실 클레이는 인스턴트커피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인공적인 느끼한 맛이 강해서, 프림이 들어간 것보다는 블랙으로 마시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고 그가 준 것을 거절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며 클레이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깨에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조금의 무게가 제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 클레이는 그와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못한다. 바로 내일이면 그와는 한동안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더, 더 얼굴을 보기 힘들어진다.


"힘내주게, 클레이."

"하하, 별 말씀을."


클레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 마냥 웃어 보인다. 윌리엄의 손길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러다 문득 얼굴 아래로 향하는 손에 멈칫하며 제 손을 거둔다. 그는 분명히 잘 해낼 것이다. 가장 신뢰하는 동료로써, 또 멘토로써. 그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암살자'니까.


"시간이 늦었는데, 좀 자두지 그러나."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하하, 그런가. 나는 오늘 좀 잠들긴 힘들 것 같은데."


윌리엄은 가볍게 미소를 띤다. 그를 보내는 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클레이는 걸치고 있던 그의 외투를 벗어 다시 돌려준다. 그의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지만 윌리엄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럼 먼저 실례." 그는 클레이의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흰 목덜미에 미약하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손을 거두고는, 그가 방으로 들어가자 다시 신문으로 눈길을 돌린다. 진정해, 뭐하려는 거야. 윌리엄은 그가 남기고 간 빈 머그컵을 본다. 본디 제 것이었지만. 손에 쥐자 아직 남아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윌리엄은 밤새도록 그 머그컵을 붙잡고 있었다.


Nothing is true, Everything is permitted.


클레이는 그 말을 수없이 되새겼다. 처음엔 전혀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윌리엄은 루시를 신뢰할 것을 제게 당부했고, 자신은 그가 신뢰하는 사람을 믿는 것뿐이다. 클레이에겐 'Subject 16' 다시 말해 실험체 16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클레이는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들이 바라던 세상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 만약에라도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클레이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끝난 그 이후에, 윌리엄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이 무엇인진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지만. 루시는 윌리엄에게 암살자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고, 친절하고 유능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실험이 계속될수록 클레이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만큼, 자신의 신체에도 점점 이상이 생기고 있었다. 비딕은 자신에게 과도하게 선조의 기억을 보도록 명령했고, 클레이는 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기억이 재생되는 동안 그들은 에지오와 ‘Apple’ 에 대해 알아냈으며, 그것에 대해 더욱 열띤 관심을 보이며 그것들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좀 쉬어도 됩니까?”

“조금만 더 일해 주시면 생각해 보지요.”

“정말 거짓말을 잘하시네요, 비딕.”

“그를 돌려보내게, 스틸만 양.”


클레이는 애니머스에 노출되면서 가끔씩 자신의 시대와 다른 환영들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았고 있지도 않은 것들이었지만 점차 그들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헛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났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실험이 재개되었고, 클레이는 그때 데스몬드의 이름을 들었다. 데스몬드 마일즈. 윌리엄 마일즈의 아들. 가끔씩 굉장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던 윌리엄이 생각났다. 그 시선에 클레이는 얼굴도 모르는 인물에게 처음으로 부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는 어릴 때를 회상하며 아버지다운 면모를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유가.


「그러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확실해졌군요. 데스몬드 마일즈를 도우세요.」

「난… 안돼, 왜 나야. 싫어!」

「이 계시는 수천 년간 때를 기다려왔어요. 이제 그 약속은 완수되어야 해요. 앞으로 나아가서, 눈을 뜨고 진실만을 보도록 하세요.」


클레이는 고민했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어린 시절의 자괴감이 다시금 저를 짓누르고 있었다. 실험은 쉴 새 없이 자행되었고 정신이 점점 부서져 내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클레이 카츠마렉. 그를 실망시킬 수는 없어.


“어떻게 지내세요, 아버지? 잘 버티고 계세요? 엄마가 사라진 게 힘드실 건 알아요.”

“우리 업주가 이 진절머리 나는 경제 덕에 일거리를 떼 오질 못하는구나. 1주일 내내 일을 하지 못했다.”

“고되시겠네요. 수표 보냈어요.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도착할 거예요.”


클레이는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연락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비딕의 목적을 알아낸 후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빠져나가자고 말하려 했으나, 그 다음 비딕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변절자였다. 왜 지금까지 그걸 몰랐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던 거지? 클레이는 당황했다.


**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빛이, 그리고 그 뒤로 찾아온 캄캄한 어둠. 그게 다였다. 끝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처박혀, 끝내는 인류 본원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기억들이, 그 모든 것들이 자신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이고 녹아들었다. 그리고 점차 좀먹어가던 것들이 남아있던 정신마저 파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구원은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별로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제가 그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단지, 조금이나마 위안을 가진 것에 만족했다. 아니 만족해야만 했다. 클레이 카츠마렉은, 언제나 그의 도구로써 쓰였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인물이니까. 어쨌거나 그는 제 전부에 가까운 사내였고, 제 마지막 안식처였다. 클레이는 생각했다. 자신은 그에게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그는 한 사내의 아버지고, 암살단을 책임지는 자다. 자신은 그의 수하 중 한명일 뿐이고. 어쨌거나 그와 자신의 관계는 그게 전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랬어야만 했다.


클레이 카츠마렉, 내가 너에게 주는 기회는 오직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클레이 카츠마렉은 제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모두를 위해 희생한 제 자신이 대단했다. 겨우 오 분도 안가서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지만. 한때나마 가족이라 생각했던 모두가 원망스럽고, 끔찍했다. 저는 윌리엄에게 가족 같은 감정을 바랬는지도 몰랐다. 그가 아들에게 갖고 있던 죄책감과 책임감을 흔들어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은 가끔 저를 정말 아들처럼 대하기도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다거나 함께 차를 마시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거나. 물론 이야기의 대부분은 임무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릴 적의 아버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저 그것과는 다른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루시가 자신과 윌리엄을 배신한 것을 알았을 때, 클레이는 사실 반쯤 제 목숨을 포기했다. 윌리엄. 당신이 틀렸어. 그녀는 당신이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야.


숨이 끊어질 듯 가까스로 마지막 암호문을 끝마치고, 벽에 쓰러지듯 기대어 누웠을 때 클레이는 마지막으로 윌리엄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쌍한 사람. 그리고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굴 불쌍하다 여기는 거람. 결국 끝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난 사람이 그라는 게 클레이는 우스웠다. 빌어먹을. 제 마음은 항상 그를 향해 있었고, 제 시선은 항상 그를 쫒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깨달아버린 그 빌어먹을 감정이라는 것에 클레이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조차도 제멋대로 나지 않아서, 클레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절대로 그는 죽어서도 제 마음을 몰랐으면 했다. 자기 혼자만 깨달아버린 게 억울하고 분해서, 그리고 슬퍼서. 클레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 저 혼자밖에는 없었다. 몇 번이고 소리를 질러 부르고 결국엔 지쳐 어둠속에 떨어졌을 때 데스몬드 마일즈의 생각이 났다. 처음 데스몬드 마일즈의 이름을 들었던 때를 생각한다. 그 이름이 처음 들렸을 때, 마치 머리를 강하게 때린 것처럼 한 순간의 충격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윌리엄 마일즈의 아들. 데스몬드 마일즈. 질투, 분노, 슬픔 등등. 그깟 단어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아비에게 갖고 있던 감정 때문이었을까. 그 만은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서, '윌리엄 마일즈' 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자신이 어릴 때 겪었던 그런 것들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클레이 카츠마렉은 웃었다. 멍청하게도.


주님은 저의 목자이시니, 저에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저를 푸른 초장에 뉘게 하시고, 고요한 물로 날 이끄시며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진실로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설령 내가 어두운 골짜기를 걷고 있다 할지라도 당신께서 함께하시면 난 악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의 지팡이 덕분에 전 위안을 얻습니다. 적들 속에 제가 있을 때 제 앞에 상을 차려 주십니다. 제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고 제 잔은 흘러넘칩니다. 당신의 미덕과 사랑이 확실히 항상 저희에게 임할 것입니다.


클레이 카츠마렉은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부터의 기억을 회상한다. 여느 아이들 못지않게 밝고 활기찼던 그 시절을.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던 그 때를. 다른 이들처럼 꿈이 있었고, 미래가 있었고, 희망이 있었던 그 때를.


그리고 뒤이어 생각한다. 희생된 자의 말로를.


클레이는 그것이 기쁘기도, 또 우습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서,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기로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안배된 결과에 따랐을 뿐. 애니머스 섬에서, 그리고 검은 방에서. 클레이는 처음에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으려 애썼다. 그리고 처절하게 절망하고, 또 울고, 분노하고, 결국에는 웃었다. 실험체 16호.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데이터 덩어리의 집합체. 자신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아마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런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데스몬드는 달라. 나와도, 다른 누구와도. 애니머스 안에서 그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를 생각한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정, 그리고 생각. 그게 과연 자신의 생각일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데이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자신의 온전한 감정인걸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일그러지고 뒤섞인 감정들을 도저히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었다. hAppY? AnGRy? pOOr? 글쎄. 그런 간단한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었을까? 그 단순한 홀로그램이, 과연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끝까지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어둠 속에서 나를 찾아.


클레이는 그를 꿈꾼다. 언제부터 계속되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가 제 손에 잡히기를, 그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비록 제 몸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니더라도. 제 정신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니더라도. 클레이는 그것이 집착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어도 그리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다.


Hold me down, all the world's asleep

I need you now, you knock me off my feet


데스몬드가 검은 방에 들어왔을 때 클레이는 굉장히 기뻤다. 아마도 평생 맛보지 못했던 커다란 행복감마저 맛보았을 것이다. 몸 전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어. 직접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분하에 그를 돕고 싶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을 말하기엔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가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과는 다르길 바랐다. 그의 몸이… 자신처럼 벌레 먹이만큼은 되지 않기를. 얼마나 바래왔고, 또 소원했던 것인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억지로 정신을 다잡아가며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표식을 새겼다.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다 했을 것이다. 그만큼 클레이에게는 사명과도 같은 일이었고, 뒤틀려가는 정신을 억지로 움켜쥔 채로 모든 것을 끝마쳤다.


처음 그가 저를 대면했을 때 데스몬드는 어리둥절해 하며 자신을 낯설어 하고 꺼려했다.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것에 상처받을 정도로 여리진 않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클레이 카츠마렉. 넌 대체 뭘 원하지? 그러나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정신이 붕괴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꿈을 꾼다. 손을 잡고 싶다. 잡을 수가 없다. 어둠 속에 혼자남아서 또다시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다.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

sAVe mE.


"데스몬드, 이것 좀 들어봐…. 내가 너랑 같이 가면 어떨까?"

"나랑… 어디를?"


도망가. 아냐, 같이 가줘. 내가 알고 있는 건 분명 너라면….

나를 데려가줘. 같이 도망쳐. 아냐, 아니야. 제발, 그래. 함께.


"가능할지도 몰라. 잠깐이면 돼. 내가 나가는 길을 찾을 때까지 만이야. 다른 육체가 있을 지도 모르고… ─아니…….모르겠어. 그냥… 더는, 여기 있기가 싫어서."

"그건,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아냐… 나한텐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라. 날려먹었지만."


데스몬드의 말에 클레이는 히죽 웃으며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날 붙잡아줘. 같이 도망치자. 난 모르겠어. 함께 가줘. 잠시만, 잠시만이면 되니까. 사라져. 나를 어둠속에서 찾아. 옆에 있어. 가지마. 그에게 자신은 그저 미친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뭐? 달라져서 좋은 게 있나? 그가 자신을 정상으로 느낀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나? 아니, 그럴 일은 없다. 클레이는 웃었다. 운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끝까지 함께 할 거야. 내가 사라지기 전 까지는.


클레이는 데스몬드가 누워있을 때마다 항상 옆에 앉아 가만히 얼굴을 응시하곤 했다. 구해주고 싶었다. 후회하지 않게, 제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사랑? 그런 것 따윈 모른다. 살아오는 내내 사랑 같은 건 해본적도 없는 제가 그딴 걸 알 턱이 없지 않나. 그냥, 그냥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의문 따윈 더 이상 가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와는 단 한군데도 닮지 않은 얼굴. 공통점은 선조들과 실험체라는 것. 무엇이 저를 그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저…. 그저.


"후회해 본 적 있나, 데스몬드?"

"뭘?"

"도망친 것. 부모님을 남겨두고 달아났지. 그리고 거지같은 직장을 구해서는 잘 나가는 척 하고. 중요한 결정을 무시하면서 낭비하는 인생이 대체 무슨 소용이야?"

"이봐…."


클레이는 웃었다.


"그래, 넌 암살자지. 하지만 그건 네가 원해서 된 게 아니야."

"요점이 뭔데?"

"네가 후회하는지 알고 싶은 거야."

"당연하지. 좀 더 부모님이랑 지냈어야 하는 거였어. 얘기를 들어줬어야 했고. 그리고 루시의 일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도- 잘 모르겠어."

"고맙다."

"뭐를?"

"깨달아 준 것 말이야."


데스몬드는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가 자신에게 하는 말도, 그 말의 뜻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쌍한 사람. 그리고 그는 미쳤지. 가엾고, 딱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게 다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더 미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구해줄 수 있다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조차도 어찌될지 모르는 마당에 그를 신경 쓸 겨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아쉬운 얼굴로, 슬픈 표정으로 그는 웃는다. 처음엔 그저 광기에 가득 찬 미친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데스몬드는 가끔씩 이 넓은 공간에 혼자 있었을 클레이의 기분을 생각했다. 공허함. 외로움. 쓸쓸함. 제가 다시 되돌아가려 하게 만든 그 감정들. 그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혼자였다.


데스몬드가 점점 더 기억을 재조립하고, 정리해감에 따라 클레이는 언제일지는 모르는 ‘최후’가 점점 더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점점 제게서 멀어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냐, 나와는 다른 사람이잖아. 모든 것은…. 애니머스는 분명 이 모든 공간을 지우고 저를 지우고 그마저도 지워버릴 것이다. 그 최후의 순간에 그만은 지켜낼 수 있기를. 제가 삭제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말 괜찮아? 클레이 카츠마렉. 진짜로 괜찮아? 그 물음에 클레이는 비웃음조로 답했다. 괜찮지 않을 건 또 뭔데? 이미 끝난 일인데. 되돌이킬 순 없는데. 이미 이끌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최후’에. 세상이 조각나고, 흰 빛에 휩싸여 사라져간다. 이토록 빠르게 다가오리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지만 지체할 여유 따위는 없다. 그래, 데스몬드. 이게 내가 할 일이니까. 내가 바라던 일이야. 후회하진 않아.

클레이 카츠마렉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살아남아. 데스몬드.


"인간은 기억의 집합체일 뿐이야! 우리는 살아가는 이야기 자체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이러지마!"

"널 구하려는 거야, 멍청아! 가!!"


손도, 발도 산산이 부서져나간다. 데스몬드의 당황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멍청아, 빨리 안가고 뭐하는 거야! 그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데스몬드가 멀어져간다. 자꾸만 뒤돌아보는 그가 빛 속에 점점 삼켜진다.


안녕.

그것으로 클레이 카츠마렉은 완전히 사라졌다.


**


데스몬드는 꿈을 꾼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기억인지 알 수는 없다. 남자는 데스몬드 자신을 본다. 그 남자가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의 시선은 누군가를 꼭 닮아있다. 어딘가 서려있는 광기 뒤로 숨겨져 있는 쓸쓸함. 그 속에서 무엇인가 자신을 울컥하게 만들어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진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항상 끝에 있는 건 데스몬드 자신이다.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시선은 묘하게 애달프고, 한없이 다정하고, 질투 섞인 환희의 감정으로 뒤섞여있다. 갑자기 중심을 잃고 하염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 내린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데스몬드는 눈을 떴다.


"헉…."


알 수없는 일이다. 혼입효과의 또 다른 부작용일까? 누구의 기억을 엿본 것인지 파악할 수조차 없다. 지나치게 불분명한 것들. 무언가 강한 힘에 짓눌린 듯한 자의식과 감정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미약한 흰 빛의 잔상을 손으로 더듬는다. 만져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잡으려 손을 뻗어 보지만 제 손을 통과하고 금세 흩어지고 말 뿐이다. 문득 클레이의 생각이 났다. 익숙한 시선의 느낌. 그래, 그는 제 눈앞에서 산산 조각나 사라졌다. 자신을 지키려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그 닳아있는 시선이 머물러 있던 곳을 생각한다. 뒤섞여있던 기억들이 명료해진다. 감정의 홍수에 던져진 기억이라는 돌멩이가, 억류되어 있던 모든 것들을 파도처럼 휩쓸어버린다.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터져 나온다. 차가운 밤공기에 뺨에 닿아 물방울이 되어 녹아내린다. 아직 제 팔에 남겨진 그의 온기를, 그 흔적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 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혀 안에 맺혀 차마 입 밖으로 뱉어낼 수 없었던 그 말들을.


미안해.


목이 메어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다. 몇 번이고 말을 뱉어보아도 더 이상 닿지 않는다. 닿을 수 없다. 손을 잡으려 해도, 몸을 끌어안으려 해도, 흰 빛은 그저 흩어져버린다. 그는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자신은 멈춰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울 수 없었기 때문에, 외면했기 때문에 그의 흔적들을 볼 수 없었던 거야. 이미 지나가버린 일의 후회들을 고통스럽게 떠나보낼 것을 알 수 없었어. 그 기억 속에서 언제나 머물러 있을 거란 생각만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하지만 모든 게 꿈만 같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언제나 옆에 존재하며 함께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버렸다.

데스몬드는 그만 어린애처럼 엉엉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